[K라이프저니|고요비 기자] 영국을 대표하는 클래식 레이블 하이페리온(Hyperion Records)이 클래식 음반 역사상 가장 야심찬 기획 중 하나로 평가받는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The Romantic Piano Concerto)' 완전판 박스세트를 지난 10일 공식 출시했다.
50장의 CD에 59명의 작곡가, 130개 작품, 총 235곡의 피아노 협주곡 레퍼토리를 담은 이 전집은 1991년부터 2007년에 걸쳐 진행된 장장 17년의 기록 프로젝트가 마침내 완결판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클래식 음반사를 다시 쓴 17년의 대장정
이 전집이 갖는 문화사적 의미는 단순히 음반의 방대한 분량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하이페리온은 19세기 내내 연주회장을 가득 메웠으나 20세기 들어 소수의 '표준 레퍼토리'에 밀려 잊힌 작곡가들의 협주곡을 체계적으로 복원했다. 쇼팽,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처럼 오늘날도 연주되는 대가들의 작품은 물론, 모리츠 모슈코프스키, 제르기 보르트키에비치, 아돌프 폰 헨젤트, 헨리 홀든 허스, 프란시스 에드워드 바흐 같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작곡가들의 협주곡이 현대적 음질로 되살아났다. 이는 단순한 음반 기획이 아니라, 19세기 피아노 문화 전체를 복원하는 학술적 사명에 가깝다.
사진 속 박스세트에는 50장의 알록달록한 CD가 부채꼴로 펼쳐지고, 멘델스존·리톨프·생상스·마르크-앙드레 아믈랭 등의 이름이 선명하게 찍힌 개별 슬리브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봉된 해설 북클릿에는 연주자 사진과 함께 방대한 음악학적 주석이 담겨 있어, 이 전집이 '듣기 위한 음반'인 동시에 '연구하기 위한 자료'임을 증명한다.
솔로이스트 군단—이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들이 집결하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솔로이스트 명단은 그 자체로 하나의 '피아니스트 명예의 전당'이다. 마르크-앙드레 아믈랭(Marc-André Hamelin), 스티븐 허프(Stephen Hough), 스티븐 오즈번(Steven Osborne), 개릭 올슨(Garrick Ohlsson), 피터 도노흐(Peter Donohoe), 드미트리 알렉세예프(Dmitri Alexeev), 니콜라이 데미덴코(Nikolai Demidenko), 아르투르 피자로(Artur Pizarro) 등 하이페리온이 자랑하는 최정예 피아니스트들이 총출동했다.
이 중 아믈랭은 인간의 손가락으로 가능한 모든 기교를 구현하는 피아니스트로, 알캉·부조니같은 초고난이도 레퍼토리를 소화하며 전집의 기술적 신뢰도를 높였다. 스티븐 허프는 섬세한 음색과 지성적 해석으로 멘델스존 협주곡 시리즈를 담당해 악보 너머의 내면까지 조명했다. 데미덴코와 알렉세예프는 러시아 학파의 웅혼한 에너지와 정밀한 페달링으로 스크랴빈·라흐마니노프·글라주노프 계열 작품들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지휘자와 악단—절제된 지원이 빚어낸 균형의 미학
반주를 맡은 악단과 지휘자들 역시 범상치 않다. BBC 스코티시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본머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바르샤바 필하모닉, 버겐 필하모닉, 울스터 오케스트라 등 영국 및 유럽 정상급 악단들이 참여했다. 오스모 밴스캐(Osmo Vänskä), 마틴 브래빈스(Martyn Brabbins), 앤드루 리튼(Andrew Litton), 마크 엘더(Mark Elder), 사카리 오라모(Sakari Oramo) 등 실력파 지휘자들이 협주곡의 오케스트라 파트를 이끌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지휘자의 역할은 '반주'에 머물지 않았다. 대부분의 수록 작품이 처음으로 현대적 녹음을 갖는 곡들이었기에, 지휘자들은 악보 교정과 오케스트레이션 균형을 새롭게 구축해야 했다. 브래빈스는 특히 리톨프의 '콩세르 상포니크' 시리즈에서 19세기 프랑스-독일 절충 양식의 화려함을 능숙하게 살려냈다는 평을 받는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건져낸 작곡가들—음악사에서의 재조명
수록된 59명의 작곡가는 19세기 음악사의 스펙트럼 전체를 아우른다. 이들은 크게 세 층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오늘날도 공연장에서 살아남은 작곡가들이다. 쇼팽·멘델스존·생상스·브람스·차이콥스키·라흐마니노프·스크랴빈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의 협주곡은 이미 수많은 녹음이 존재하지만, 하이페리온은 이들을 보너스 트랙처럼 배치해 전체 레퍼토리의 역사적 좌표를 확인하는 기준점으로 활용했다. 특히 쇼팽의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대 폴로네즈', 멘델스존의 두 대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처럼 연주회에서 좀처럼 듣기 어려운 희귀작을 포함시킨 점이 눈에 띈다.
둘째, 19세기에는 절대적 인기를 누렸으나 현재는 거의 잊힌 거장들이다. 이그나츠 모셸레스(Ignaz Moscheles)는 베토벤의 제자이자 쇼팽·멘델스존과 교분을 나눈 인물로, 7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남겼다.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는 오페라 작곡가로 더 알려졌지만, 그의 두 피아노 협주곡과 '콘체르트슈튁'은 낭만주의 피아노 글쓰기의 원형을 제시한 작품이다. 앙리 에르츠(Henri Hertz)는 19세기 파리 살롱을 지배한 피아니스트-작곡가로, 8개의 협주곡 중 6개가 이 전집에 수록됐다.
셋째, 음악사 교과서에서조차 이름을 찾기 어려운 진정한 희귀 작곡가들이다. 프랜시스 에드워드 바흐(Francis Edward Bache), 헤이든 우드(Haydn Wood), 헨리 홀든 허스(Henry Holden Huss), 이빈 알내스(Eyvind Alnaes)의 협주곡이 이 전집에서 사실상 세계 초연 수준의 현대적 녹음을 갖게 됐다.
재밌고 특별한 탄생 에피소드들—작곡가들의 숨겨진 이야기
수록곡들 중에는 드라마틱한 탄생 배경을 가진 작품들이 여럿 있다.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Erich Wolfgang Korngold)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op. 17'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은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형)의 의뢰로 작곡됐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을 위한 왼손 전용 협주곡을 라벨·프로코피예프·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에게 의뢰했는데, 코른골트의 작품은 그 중에서도 후기 낭만주의의 풍성한 관현악법을 가장 화려하게 구현한 곡으로 손꼽힌다.
이그나츠 얀 파데레프스키(Ignaz Paderewski)의 '피아노 협주곡 op. 17'은 이후 폴란드의 대통령이 된 작곡가의 유일한 피아노 협주곡이다. 파데레프스키는 20세기 초 연주 경력과 정치 경력을 병행하며 폴란드 독립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됐는데, 이 협주곡은 그가 정치가가 되기 이전 젊고 순수한 피아니스트-작곡가였던 시절의 결정체다.
페루치오 부조니(Ferruccio Busoni)의 '피아노 협주곡 op. 39'는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긴 피아노 협주곡으로, 독창자·합창단·대규모 오케스트라·독주 피아노가 함께하는 다섯 악장의 대작이다. 연주 시간이 약 80분에 달해 단독으로 CD 한 장을 꽉 채우는 이 작품은 1904년 초연 이래 "도대체 어떻게 연주하는가"라는 의문 속에 거의 100년 동안 레퍼토리에서 방치됐다. 하이페리온의 이 녹음은 그 환상적 규모를 온전히 구현한 보기 드문 기록이다.
헨리 찰스 리톨프(Henry Charles Litolff)의 '콩세르 상포니크'들은 흥미로운 인물 서사와 결부된다. 리톨프는 영국 태생이지만 파리를 무대로 활동한 반낭만주의적 기인으로, 첫 번째 아내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밤중에 창문으로 탈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의 스케르초 악장은 훗날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형식에 영향을 미쳤을 만큼 혁신적이었다.
낭만의 피아노의 정신
이 전집에 수록된 협주곡들은 하나의 공통된 미학적 충동에서 비롯된다. 19세기, 20세기 초 피아니스트-작곡가들은 피아노를 단순한 악기가 아닌 '자아의 확장'으로 보았다. 협주곡이라는 형식은 개인(독주자)과 집단(오케스트라)의 대화이자 대결이었고, 그 안에서 낭만주의 예술가의 고독과 열망, 민족 정체성과 세계주의 사이의 긴장이 울려 퍼졌다.
러시아 민요 주제를 활용한 아렌스키의 '환상곡 op. 48', 스코틀랜드 선율을 전통 소나타 형식에 이식한 매켄지의 '스코티시 협주곡', 폴란드의 민족적 서사를 담은 스토이오프스키와 샤르벤카의 협주곡들은 모두 '민족주의 피아니즘'이라는 19세기 후반의 대조류를 반영한다. 반면 멘델스존의 협주곡은 고전적 단아함과 낭만주의적 감성의 완벽한 균형을 추구했고, 생상스의 다섯 협주곡은 프랑스적 명징성과 화려한 기교주의를 결합했다.
메트너(Medtner)의 세 피아노 협주곡은 20세기 초반 모더니즘의 물결 속에서도 굳건히 조성 음악과 소나타 형식을 고수한 작곡가의 미학적 신념이 담겨 있다. 메트너는 라흐마니노프의 절친한 벗이었으며, 라흐마니노프는 생전에 "메트너야말로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메트너의 음악은 생전에도, 사후에도 늘 라흐마니노프의 그늘에 가려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했고, 이 전집은 그 불균형을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
이 전집의 궁극적 가치—음반이 아니라 '살아있는 박물관'
하이페리온의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 전집은 음반 컬렉션의 차원을 넘어선다. 이 50장의 CD는 19세기 서양 클래식 음악의 한 장르가 얼마나 넓고 깊었는가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아카이브다. 오늘날 우리가 '피아노 협주곡'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몇 개의 걸작들—차이콥스키 1번, 라흐마니노프 2번, 그리고 쇼팽—은 이 방대한 산맥의 몇 개 봉우리에 불과하다. 산맥의 나머지 부분, 그 광활한 능선과 계곡들이 이 전집 안에 처음으로 한데 모였다.
올해 4분기에는 이 에디션의 2부가 출시될 예정이다. 1부에서 보여준 하이페리온의 기획력과 연주 수준을 감안할 때, 2부 역시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잊힌 대륙의 새로운 지도를 그려낼 것으로 기대된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면, 혹은 19세기 유럽 문화의 깊이를 탐구하고자 하는 이라면, 이 전집은 단순한 구매가 아닌 일생에 한 번의 발견이 될 것이다. 하이페리온이 17년에 걸쳐 쌓아 올린 이 기록 유산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의 불멸의 표준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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